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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팅에서는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되어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동화작가인 아이소포스, 이솝에 대해서 이야기 했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조선시대에 이솝처럼 노비의 신분을 뚫고 부원수까지 오르고, 또 이순신 장군과 같은 충무공의 시호를 받은 정충신이 있습니다.
오늘은 노비의 성공신화를 쓴 충무공 정충신에 대해 포스팅 하려 합니다.
함께 살롱으로 떠나보실까요? :)
1. 정충신은 누구?
정충신은 1576년 전라도 나주의 노비 출신으로, 아버지 정륜과 어머니 영천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정충신의 아버지는 광주 향청(鄕廳)의 좌수였고, 어머니는 노비 신분이었습니다.
정충신은 당시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서 노비가 되는 “노비종모법”에 따라서 노비가 되었죠. 당시 그의 이름은 충신이 아니었습니다.
정충신이 17세가 되던 해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당시 나주 목사로 부임해 있던 권율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나이는 어렸지만 민첩하고 영리했던 충신은 권율 장군의 눈에 들기 시작했죠.
권율 장군의 신임을 받게 된 충신은 종종 왜군들의 적지를 정찰하고 보고하는 연락책으로 활동했습니다.
당시 왜군들은 파죽지세로 조선의 땅을 점령하며 갖은 횡포를 부리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은 물론, 조선의 군사들조차도 왜군의 기세에 벌벌 떨고 있었죠.
나주 목사였던 권율 장군은 피란 길에 올라 의주에 가 있는 선조에게 임진왜란의 상황을 보고하는 “장계(狀啓, 왕명을 받고 지방에 나가 있는 신하가 자기 관하의 중요한 일을 왕에게 보고하던 문서)”를 전달해야 했는데, 장계를 전달하겠다고 나서는 군사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왜군들의 기세에 모두 몸을 사렸기 때문이죠.
이때, 나라와 임금, 그리고 자기의 주인인 권율 장군에게 충성하는 마음으로 선뜻 나선 이가 바로 노비 정충신이었습니다.
권율 장군의 장계를 가지고 나주에서 출발한 정충신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천신만고 끝에 의주에 있는 선조에게 장계를 전달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 모습을 본 권율 장군의 사위, 백사(白沙) 이항복은 이런 정충신을 눈여겨보았죠.
정충신은 이항복의 주선으로 학문을 배우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무관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항복은 그에게 직접 “충신”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죠. 노비에서 어엿한 충신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 바로 이때였습니다.
또한 장계를 전달받은 조선의 선조 임금은 정충신의 수고를 높이 샀고, 충신을 노비에서 면천을 시켜주었습니다.
신분의 제한이 풀린 이후, 정충신은 이항복의 집에 머물면서 학업을 익혔습니다.
이항복은 충신을 아꼈고, 이항복의 가르침 아래서 열심히 공부했던 충신은 그해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게 됩니다.
2. 정충신의 업적
병과에 급제한 정충신은 1602년에 명나라에 가서 점차 세력을 확장하는 여진족의 정세를 파악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608년에는 조산보만호에 임명되어 무관으로 활동했죠.
1618년에는 조선의 정사를 뒤흔들었던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였고, 스승인 이항복이 북청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자, 정충신은 관직을 내려놓고 스승을 모시고 동행하여 스승의 유배 생활을 옥바라지하는 충성된 면모를 보여줍니다.
1619년에는 명나라의 요청으로 도원수 강홍립이 출병하였으나, 후금에 대패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누구보다 여진족의 정황에 밝았던 정충신은 다시 등용되었죠.
이 공로를 인정받아, 정충신은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에는 위성 원종공신 2등(衛聖原從功臣二等)으로 책록되었습니다.
1621년에는 만포첨사로 국경을 수비를 정비했고, 후금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고 조선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하였습니다.
이후 그가 안주목사 겸 방어사로 재직중이던 1623년에는 인조반정이 일어났는데, 정충신은 이 일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절친했던 이괄 장군이 이괄의 난을 일으킵니다. 이괄 장군과 친분이 두터웠던 정충신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죠.
그러나 그는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전부대장으로 나서 난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정충신은 황주와 서울 안현에서 반란군들과 싸워 이겨서 진무공신 1등에 책록되어 금남군에 봉해지고, 이어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영변대도호부사가 되었습니다.
이후 정충신은 병을 얻어 관직에서 물러나 요양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1627년, 조선과 후금 사이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다시금 공로와 전문성을 인정받아, 부원수에 임명되었습니다.
1633년 조정에서 후금과 단교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는데, 정충신은 반대하며 후금과의 화친을 주장하여 당진에 유배가게 되었다가, 이후에 장연에 이배된 뒤 풀려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듬해 포도대장과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1636년 3월, 정충신이 우려한 대로 조선의 조정에서는 후금(청나라)를 배척하는 주전론이 득세하여 청과 단교하는 사신을 보냈고 후일 병자호란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충신의 안목이 옳았던 것입니다. 그는 유능한 무신이자, 동시에 외교 전략가였습니다.
3. 충무공 정충신
“ 충무(忠武)” 는 국가에 큰 공을 세운 군인이나 장군 등에게 내려졌던 시호이며, 그것을 높여 부를 때, 충무공(忠武公) · 충무후(忠武侯)라고 합니다.
이러한 충무라는 시호는 고려시대에 3명, 조선시대에 9명으로, 역사상 총 12명이 충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물론 성웅(聖雄)으로 불리는 충무공 이순신이 가장 널리 알려져있고 유명한 분임에는 틀림었습니다만, 이순신 장군 외에도 11명이나 나라에 큰 획을 그었던 업적을 기려 충무공 시호를 받은 것이죠.
그 중 하나가 오늘의 주인공인 충무공 정충신입니다.
“충신”이라는 이름대로, 그는 나라와 임금에 충성하고, 스승과 동료 대신들에게는 신뢰를 보여준 사람입니다.
이름대로 살다간 것을 보면, 이항복의 작명 센스가 정말 탁월했다고 할 수 있지요.
앞서 포스팅 했던 아이소포스 이솝처럼 노비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최고의 자리를 올라간 점은 참 비슷합니다만, 아이소포스 이솝은 마지막이 좋지 않았던 데에 비해, 정충신은 충무공 시호까지 받으며 정말 본이 되는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자, 오늘은 조선시대 성공한 노비, 충무공 정충신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도움이 되셨기를 바라며, 다음에는 더 유익한 내용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지금까지 삶을 풍요롭게 하는 새롭고 놀라운 지식의 향연, 온라인 살롱, 새놀살롱(Saenol Salon)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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